평가항목의 내용은 다 넣었는데 왜 밋밋할까?

테크노파크, 산업진흥원, 관광재단, 문화재단,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공모사업 제안서를 맡는 담당자와 연구원이라면 이 감각을 알 것이다.
자료는 두툼하게 나왔고 프로그램도 알차게 채웠는데, 다 쓰고 나서 읽어보면 어딘가 심심하다.
밋밋함의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서에서 우리 지역(기관)명을 다른 곳으로 바꿔보면 된다.
그래도 문장이 그대로 성립한다면 그 제안서는 우리 지역, 우리 기관만의 제안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문장력이나 디자인에서 오지 않는다.
논리를 쌓아 올린 순서에서 온다.
공공기관 공모사업 제안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수행 기관이 사실상 정해진 지정형이 있고, 여러 지역이 같은 사업을 두고 붙는 공모형 경쟁 사업이 있다.
문제가 생기는 쪽은 대부분 후자다.
공모형 경쟁 사업의 사업제안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서가 아니다.
왜 이 사업이 우리 지역에서 실행되어야 하는지를, 다른 후보지와의 비교 위에서 증명하는 문서다.
이 전제가 빠지면 아무리 알찬 프로그램을 넣어도 문서 전체가 평평해진다.
사람 몸에 코어 근육이 있듯 제안서에도 뼈대가 있다.
그 뼈대는 세부 프로그램이 아니다.
사업의 취지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경쟁 구도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뼈대다.
세부 프로그램은 논리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이어야 한다.
매일 하는 일부터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현장에서 만난 담당자와 연구원들은 대부분 유능했다.
그런데 공모사업 제안서만 잡으면 비슷한 지점에서 막혔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부터 그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숲은 사업의 취지와 선정 포인트, 그리고 경쟁 구도에서의 차별점이다.
나무는 예산이 실제로 쓰이는 세부 프로그램이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 구조의 문제다.
담당자는 세부 프로그램을 매일 수행하고 그에 대한 예산을 집행한다.
반면 공모 제안서의 논리는 3년이나 5년에 한 번 쓴다.
익숙한 쪽에서 아이디어가 먼저 나오고, 빠르게 구체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설적으로 실행을 잘하는 조직일수록 이 함정에 깊이 빠진다.
쌓아둔 프로그램 자산이 많으니 채우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뼈대를 세울 시간이 사라진다.
프로그램이 먼저 정해지면 벌어지는 일
프로그램이 확정되면 예산 배분이 함께 끝난다.
그다음 남은 일은 이미 정해진 내용을 정당화하는 문장을 붙이는 작업뿐이다.
사업의 취지는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도입부로 후퇴한다.
차별점은 프로그램 개수와 예산 규모로 대체된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태다.
이렇게 완성된 문서는 읽는 사람 입장에서 어느 지역(기관)의 자료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공들인 시간과 무관하게 인상이 남지 않는다.
디자인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구간이 있다

문서가 밋밋하다고 느끼면 다음 선택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제안서 디자인 외주를 알아보거나 PPT제작 업체에 발표자료를 맡긴다.
디자인은 분명히 일한다.
읽는 속도를 높이고, 복잡한 구조를 한눈에 잡아주고, 조직의 신뢰도를 올린다.
하지만 없는 논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논리가 비어 있는 사업제안서에 디자인을 얹으면 더 예쁜 접시에 올린 고기가 될 뿐이다.
접시가 좋아졌다고 상대의 선택이 바뀌지는 않는다.
디자인이 해결하는 건 전달의 문제다.
지금 겪고 있는 건 판단의 문제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예산과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게 된다.
평가위원은 우리 제안서만 보지 않는다

경쟁 공모의 심사는 절대평가가 아니다.
여러 지역의 자료를 나란히 놓고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자리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면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옆에 고기를 함께 놓고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순간부터 비교가 시작되고, 더 가치 있어 보이는 쪽이 선택된다.
여기서 대부분은 우리 빵을 더 크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프로그램을 늘리고 예산을 키우고 표지를 다듬는다.
전략은 다른 곳에 있다.
상대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비싼 고기가 당연히 낫다는 상식은 깨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파토스는 이 지점에 놓인다.
무엇을 내놓느냐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태를 알고 내놓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경쟁 공모에서 심사위원은 무엇을 기준으로 지역을 비교하는가.
공고문에 적힌 배점표만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설득력 있는 기준을 제시한 제안서가 이후 자료들의 판단 잣대가 된다.
비교의 기준을 만드는 쪽과 그 기준 위에서 채점당하는 쪽은 출발선이 다르다.
경쟁 지역의 논리를 먼저 써보는 작업

그래서 공모사업 제안서 작업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순서는 세 단계다.
첫째, 사업의 취지를 다시 읽는다.
이 사업이 왜 지금 만들어졌는지, 주관 기관이 어떤 상태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를 우리 언어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정리되지 않으면 아직 읽은 게 아니다.
둘째, 경쟁 지역(기관)의 논리를 대신 써본다.
그 지역(기관)이라면 어떤 자원과 실적을 앞세울지, 어떤 문장으로 당위를 만들지 예측해 문서로 남긴다.
정보가 부족해도 상관없다.
공개된 정책 방향과 기존 사업 이력만으로도 접근 논리는 상당 부분 그려진다.
셋째, 우리 조건을 그 예측 위에 올려놓고 다시 해석한다.
규모가 작다는 조건은 통제 가능성과 실증 속도로 뒤집힐 수 있다.
후발 지역이라는 조건은 선행 지역의 시행착오를 건너뛴다는 논리로 전환될 수 있다.
같은 조건도 어떤 취지 아래 놓느냐에 따라 열세가 되기도 하고 우위가 되기도 한다.
이 세 단계가 끝난 뒤에 세부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그때 프로그램은 예산 소진 계획이 아니라 앞선 논리를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읽히는 무게가 달라진다.
지금 쓰고 있는 제안서에 던져볼 질문

작성 중인 문서를 열어놓고 세 가지만 확인해보면 된다.
세부 프로그램 표를 전부 걷어냈을 때 남는 논리가 있는가?
경쟁 지역이 우리와 거의 같은 말을 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내세운 강점이 그냥 우리가 잘하는 일이 아닌, 사업의 취지와 직접 연결되는 것인가?
세 질문에 답이 막힌다면 문장을 다듬을 때가 아니다.
뼈대를 다시 세울 때다.
위너스피티가 사업제안서 작업을 맡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이 순서다.
목차를 짜거나 슬라이드를 열기 전에, 이 사업이 무엇을 원하는지와 경쟁 구도가 어떻게 그려질지부터 정리한다.
디자인은 그 논리가 잡힌 뒤에 붙는다.
다음 글에서는 이 뼈대 위에 미션과 비전, 그리고 골을 어떻게 설정하는지 이어서 다루겠다.
자주 묻는 질문
Q. 공고가 이미 떴는데 지금부터 분석해도 늦지 않나요?
A. 늦었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현장 방문이나 이해관계자 인터뷰처럼 시간이 드는 작업은 포기해야 한다. 공개 자료로 사업 취지와 경쟁 구도만이라도 먼저 정리한 뒤 목차를 잡는 편이 낫다.
Q. 경쟁 지역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예측이 가능한가요?
A. 대상 지역을 특정하지 못해도 유형별 예측은 가능하다. 자원이 풍부한 지역, 실적이 많은 지역, 우리와 조건이 비슷한 지역으로 나눠 각각의 접근 논리를 그려보면 대응 방향이 잡힌다.
Q. 이 분석은 담당자가 직접 해야 하나요?
A. 실무 정보는 담당자만 가지고 있으므로 자료는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다만 그 정보를 경쟁 구도 위에 배치하는 작업은 사업을 매일 수행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 외부 시선을 한 번 거치는 편이 효율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