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말, 한 핀테크 스타트업 대표와 상담하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삼성전자 C랩 오픈이노베이션에 지원한다며 가져온 제안서가 스타트업 IR 자료를 거의 그대로 복사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좋아했는데 왜 오픈이노베이션에서는 계속 떨어질까요?”라는 질문에 답은 명확하다.
투자유치와 오픈이노베이션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스타트업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만 열심히 어필하고, 정작 대기업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원하는 것은 투자수익이 아니다
대기업이 오픈이노베이션을 추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외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돌파하려는 것이다.
투자수익을 목표로 하는 VC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 제조업 대기업과 협업한 IoT 솔루션 스타트업 사례를 보면 이해가 쉽다.
이 스타트업은 제조업 현장의 실시간 모니터링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기업이 찾던 것은 바로 이런 기술이었다.
기존 제조라인의 효율성 개선이라는 명확한 니즈가 있었고, 스타트업의 기술이 정확히 그 지점을 공략한 것이다.
대기업 담당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우리 사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가.
둘째, 협업을 통해 양쪽 모두 성장할 수 있는가.
셋째, 리스크는 관리 가능한 수준인가.
여기서 핵심은 ‘상호 성장’이다.
대기업도 단순히 기술을 사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스타트업의 혁신성과 대기업의 인프라가 결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시너지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들의 진짜 니즈를 파고드는 방법

성공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제안서의 시작점은 철저한 사전조사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기업 홈페이지만 대충 훑어보고 끝낸다.
이것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해당 기업의 사업보고서다.
특히 ‘사업의 내용’ 부분과 ‘영업실적’ 섹션을 유심히 봐야 한다.
여기서 매출 구성과 성장률을 분석하면 어느 사업 부문이 정체되고 있는지, 어느 부분에 투자를 늘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에 한 자율주행 기술 스타트업과 협업 논의를 진행했던 경우를 보자.
이들은 대상 기업의 사업보고서에서 ‘전장부품’ 부문의 매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동시에 자율주행 관련 R&D 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바로 이 지점이 협업 기회였다.
중기경영계획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자료다.
대기업들은 보통 3-5년 단위로 중기전략을 수립하는데, 여기에 향후 집중할 사업 영역과 투자 계획이 명시되어 있다.
이 계획에 부합하는 기술이나 솔루션을 제안한다면 관심을 끌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해당 기업의 최근 투자 동향이다.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했는지, 어떤 기술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추적해보면 그들의 전략적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기술을 비즈니스 임팩트로 번역하라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범하는 실수가 바로 기술 자체에만 매몰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AI 알고리즘을 개발했어도, 그것이 대기업의 매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작년에 만난 한 제조 AI 스타트업 사례를 보자.
이들은 처음 제안서에서 “딥러닝 기반 품질 검사 시스템”이라는 기술적 설명만 잔뜩 넣어왔다.
하지만 실제 대기업 담당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불량률이 몇 퍼센트 개선되고, 그로 인해 연간 비용 절감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였다.
기술을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하는 핵심은 세 단계다.
첫 번째는 현재 상황 분석이다.
대상 기업이 해당 영역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임팩트 제시다.
우리 기술을 적용했을 때 어떤 개선 효과가 있는지 수치로 보여줘야 한다.
세 번째는 실행 가능성 증명이다.
유사한 환경에서의 적용 사례나 파일럿 테스트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 담당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하는 KPI에 직접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조업이라면 생산성, 품질, 안전성 같은 지표들이고, 유통업이라면 매출 증대, 고객 만족도, 운영 효율성 같은 것들이다.
윈-윈 스토리 구성의 4단계 프레임워크

성공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제안서는 명확한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구조를 4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단계 – 그들의 현재 상황과 한계점 정의
대상 기업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제시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귀하는 현재 이런 문제를 겪고 계십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업계 전반적으로 이런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입니다”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2단계 – 우리 기술로 해결 가능한 부분 명시
1단계에서 제시한 문제를 우리 기술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때는 기술적 우수성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분류 작업 효율성이 40% 개선되고, 인건비는 연간 2억 원 절감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구체적 수치를 제시한다.
3단계 – 협업을 통한 상호 성장 시나리오 제시
단순히 기술을 판매하거나 공급하는 관계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십을 제안한다.
“저희의 AI 기술과 귀사의 물류 인프라가 결합되면 새로운 스마트 물류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B2B 신규 시장 진출이 가능합니다”라는 식이다.
4단계 – 구체적인 협업 방안과 로드맵 제시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협업할 것인지 단계별로 상세히 제시한다.
파일럿 테스트부터 본격적인 협업까지의 과정을 3-6개월 단위로 나누어 설명하고, 각 단계별 목표와 성과 지표를 명확히 한다.
이 4단계 프레임워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대상 기업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스토리 구조를 갖춰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내용이라면 의미가 없다.
결국 성공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제안서의 핵심은 하나다.
“우리가 뭘 할 수 있나”가 아니라 “그들이 뭘 필요로 하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 관점의 전환이 바로 떨어지는 제안서와 선택받는 제안서의 결정적 차이다.
다음번 오픈이노베이션 제안서를 준비할 때는 자신의 기술 설명서를 펼치기 전에 먼저 대상 기업의 사업보고서부터 펼쳐보길 바란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진짜 필요한 제안서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