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창업 아이템에 Problem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모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소상공인 7팀의 IR자료를 컨설팅할 기회가 있었다.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베이커리, 관광 굿즈 브랜드, 로컬 식재료 가공 제품들이었다.
하나같이 성실하게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그런데 자료를 넘기면서 조금씩 아쉬웠다.
7팀 모두, 단 한 팀도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IR자료를 시작하고 있었다.
“현재 국내 관광객들은 기념품을 구매할 때 개성 없는 획일화된 제품에 실망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존의 지역 특산물 가공식품은 포장이 촌스럽고 선물용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끌어낸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 정의.
그리고 바로 등장하는 자사 제품.
이 팀들이 나쁜 창업자여서가 아니다.
교육에서 배운 대로 충실히 따른 결과다.
문제는 그 틀이 이 아이템들에게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PSST방식은 IR의 만능 공식이 아니다
스타트업 IR 교육 현장에서 PSST, 즉 Problem-Solution-Scale-Team 구조는 거의 공식처럼 가르쳐진다.
테크 기반 스타트업에게 이 구조는 분명히 강력하다.
비효율적인 물류 프로세스를 자동화하거나,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데이터 관리 문제를 푸는 아이템이라면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미 절반은 설득이 된다.
그런데 관광 굿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인가?
지역 특산물로 만든 밤파이는 누군가의 고통을 해소해주는가?
아니다.
이런 제품들은 처음부터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감성, 어떤 경험, 어떤 기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 제품을 집어 드는 순간의 설렘, 선물을 받는 사람의 표정, 그 지역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맛이 이 아이템의 본질이다.
없는 문제를 억지로 만드는 순간, 스토리는 꼬인다.
평가자도 안다. 저 사람이 지금 문제를 끌어다 붙이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신뢰는 조용히 빠져나간다.
억지 문제 정의가 IR자료에서 빼앗아 가는 것
PSST 방식으로 억지 문제를 만들면 생기는 부작용이 하나 더 있다.
시간이다.
IR 피칭은 보통 5분에서 10분 안에 끝내야 한다.
그 제한된 시간 안에서 억지로 만든 Problem을 설득력 있게 포장하려다 보면, 논리적 허점이 생긴다.
허점이 생기면 설명이 길어진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뒤쪽이 압축된다.
결국 정작 보여줘야 할 것들, 실제 고객 반응, 재구매율, 팬들의 자발적인 입소문, 매출 성장 추이, 이런 살아있는 트랙션을 제대로 증명할 시간이 없어진다.
심사위원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이 사업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CAC 대비 LTV가 어떻게 되는지, 첫 구매 고객의 재방문율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온라인 리뷰와 SNS 반응이 어떤 양상인지, 이런 지표들이 투자 판단의 실질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만들지도 않아도 될 문제를 끌어다 붙이느라 이 결정적인 증거들이 발표 마지막 2분에 몰리게 된다.
억지 문제 정의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설득의 기회를 갉아먹는 구조적 결함이다.
로컬 아이템 IR자료의 진짜 출발점
로컬 소상공인 아이템의 도입부에서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누가, 어떤 순간에, 왜 이 제품에서 가치를 느끼는가.”
그리고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창업자는 왜 이 아이템을 만들게 됐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진솔하게 답하는 순간, 억지 문제 정의보다 훨씬 강력한 도입부가 완성된다.
실제로 컨설팅했던 한 팀의 사례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창업자 스토리가 바꾸는 IR피치덱
경남 하동에서 못난이 농산물을 활용한 파이를 만드는 팀이었다.
처음 가져온 IR피치덱은 “못난이 농산물이 매년 버려지고, 하동은 관광객이 많지만 관광소비액이 낮다”는 두 가지 사회적 문제로 시작하고 있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왜 이 창업자가 이 사업을 하는 이유인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니 진짜 이야기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창업자는 디자이너 출신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30년 경력의 제과제빵 장인이다.
아버지가 평생 갈고닦은 레시피로 만든 밤파이는, 동네에서 입소문이 났지만 포장지는 몇십 년째 그대로였다.
딸은 그 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고 했다.
이렇게 맛있는 빵인데, 이 포장으로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그래서 자신이 직접 브랜딩을 입히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맛을 세상이 알아볼 수 있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하동을 다녀간 관광객들이 SNS에 자발적으로 올리고, 온라인 재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못난이 농산물이라는 소재는 이 맥락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버려질 뻔한 농산물을, 30년 장인이 살려내고, 딸이 세상에 내놓는 이야기.
억지로 만든 사회적 문제 정의보다 이 한 줄이 훨씬 강하다.
창업자 스토리를 IR 도입부에 배치해야 하는 이유
로컬 소상공인 아이템은 결국 사람이 만든 물건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제품을 만들게 됐는지가 브랜드의 전부다.
투자자나 심사위원은 이 사람에게 돈을 넣는다.
제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창업자가 이 아이템을 끝까지 밀고 나갈 사람인지를 본다.
창업자의 진짜 이야기가 도입부에 있을 때, 심사위원은 제품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이 사람 편이 된다.
그 상태에서 시장 규모와 수익 구조를 보여주면, 숫자가 살아 움직인다.
반대로 억지 문제 정의로 시작하면, 뒤에 나오는 좋은 숫자들도 힘을 잃는다.
가치 전달 구조로 IR자료를 다시 설계하는 법
로컬 소상공인 아이템을 위한 IR자료의 도입부는 이렇게 설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창업자가 이 아이템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를 먼저 꺼낸다.
그 경험이 어떤 소비자와 공명하는지, 누가 이 제품에서 어떤 가치를 느끼는지 보여준다.
그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창업자가 거쳐온 과정, 레시피 개발이든 유통 실험이든 브랜딩 작업이든, 그 구체적인 흔적을 보여준다.
그다음 그 가치에 반응하는 실제 트랙션, 팬들의 반응, 재구매율, 성장 추이를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그 가치에 반응하는 시장이 얼마나 되는지 TAM/SAM/SOM으로 연결한다.
이 흐름은 문제-해결 구조가 아니다.
가치 발견-가치 전달-시장 검증의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가 로컬 소상공인 아이템에는 훨씬 잘 맞는다.
강의실에서 배운 공식이 모든 아이템에 맞는 건 아니다.
내 아이템의 본질을 먼저 정확히 파악하고, 그 본질에 맞는 스토리 구조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스타트업IR에서 진짜 첫 번째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