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IR 자료, 왜 하나로는 안 될까
지난주 한 창업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피치덱 하나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굳이 두 개나 만들어야 하나요?”
아마 많은 초기 창업자들이 한 번쯤 가져봤을 의문일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타트업IR에서 피치덱과 인베스터덱은 완전히 다른 무기입니다.
하나로는 절대 투자까지 이어질 수 없어요. 마치 권투선수가 잽과 훅을 구별해서 써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지금까지 200여 개 스타트업의 IR자료를 만들면서 확신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데모데이에서 눈에 띄는 팀과 실제 투자받는 팀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 것.
그 차이가 바로 ‘두 번째 덱’에 있었습니다.
데모데이는 쇼, 투자 미팅은 협상테이블
“인상적이었어요. 인베스터덱 있으세요?”

데모데이가 끝나고 들려오는 이 한 마디가 진짜 게임의 시작입니다.
발표가 성공적이었다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이때 “아, 그게 지금…” 하고 말을 흐리는 창업자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피치덱의 역할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데모데이 피치덱은 말 그대로 ‘쇼’입니다.
5분 안에 청중 200명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무대용 자료죠.
스토리가 강하고, 감정에 호소하며, 한 장 한 장이 임팩트를 줘야 합니다.
반면 인베스터덱은 VC 사무실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협상테이블’용 자료입니다.
감정보다는 숫자, 비전보다는 계획, 가능성보다는 근거가 중요해지는 자리죠.
작년에 만난 한 푸드테크 창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데모데이에서는 박수를 받았는데, 정작 투자 미팅에서는 할 말이 없더라고요. 매출 전망이나 고객 획득 비용 같은 걸 물어보는데, 피치덱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정확한 진단입니다.
두 덱의 목적이 다르니까 구성도 완전히 달라야 하는 거예요.
피치덱은 관심을 끌고, 인베스터덱은 확신을 줍니다
피치덱의 임무는 단 하나입니다.
“이 팀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
그래서 문제-솔루션-시장-트랙션-비전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이 핵심이죠.
10장에서 15장 사이로 구성하고, 각 슬라이드마다 강력한 메시지 하나씩만 담습니다.
인베스터덱은 다릅니다.
VC가 “이 팀에 투자해도 될까?”를 판단하는 근거 자료거든요.
그래서 TAM-SAM-SOM 계산식부터 시작해서 재무제표, 고객 획득 비용, 캡테이블까지 모든 게 들어가야 합니다.
보통 25장에서 35장 정도로 구성되고, 각 슬라이드는 혼자 읽어도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자세해야 해요.
한 벤처캐피털 심사역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피치덱은 첫인상이고, 인베스터덱은 신용조회 같은 거예요. 첫인상이 좋아야 신용조회를 해보고 싶어지지만, 신용조회 결과가 나빠면 아무리 첫인상이 좋아도 소용없죠.”
투자자의 머릿속, 3주간의 여정

VC는 데모데이가 끝나자마자 투자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생기면 그때부터 ‘진짜 검토’가 시작돼요.
이 과정을 이해하면 왜 두 개의 IR덱이 필요한지 더 명확해집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발표 직후 3분입니다.
“이 팀 더 보고 싶다”는 인상을 주는 시점이죠.
피치덱의 역할은 여기까지예요.
두 번째 단계는 발표 후 1-2일입니다.
심사역이 인베스터덱을 요청하고, 팀 내부에 공유하고, 추가 자료를 달라고 하는 시기입니다.
여기서 준비가 안 된 팀들은 “아, 그 자료는 나중에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게 되죠.
이 한 마디로 게임오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2-3주에 걸친 딥다이브입니다.
실제 투자 검토가 이뤄지는 구간이에요.
고객 획득 비용과 생애가치, 시장 가정, 매출 추정치를 기반으로 시나리오 분석이 진행됩니다.
작년에 만난 한 에듀테크 창업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데모데이에서 반응이 좋아서 들뜬 마음으로 미팅에 갔는데, 첫 질문이 ‘CAC가 얼마예요?’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진짜 게임은 지금부터구나.”
숫자가 말해주는 실행력
투자자들이 인베스터덱에서 보는 건 ‘실행의 설계도’입니다.
단순히 잘 해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어떤 속도로 어떤 길로 가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이죠.
시장 크기를 말할 때도 차이가 납니다.
피치덱에서는 “100조 원 시장”이라고 큰 그림을 보여주지만, 인베스터덱에서는 “전체 시장 100조 중 우리가 접근 가능한 시장은 5조, 그 중 우리가 당장 공략할 수 있는 시장은 5천억”이라고 단계별로 설명해야 합니다.
트랙션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치덱에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상승 그래프 하나면 충분해요.
하지만 인베스터덱에서는 월별 MRR, 고객 유지율, 주요 KPI 분석까지 모든 게 들어가야 합니다.
한 바이오 스타트업 대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숫자 정리하는 게 귀찮았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우리 사업에 대해 더 명확하게 알게 되더라고요. 투자자를 위한 자료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자료였던 거죠.”
두 덱을 동시에 준비하는 실전 로드맵

그렇다면 이 두 가지 IR자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전 로드맵을 제시해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동시 진행입니다.
피치덱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인베스터덱을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시간도 부족하고, 일관성도 떨어집니다.
먼저 핵심 데이터를 모듈별로 정리하세요.
문제, 시장, 수익모델, 재무 자료를 각각 폴더로 나눠서 정리해두는 겁니다.
이렇게 해두면 피치덱을 만들 때는 핵심 메시지만 뽑아서 쓰고, 인베스터덱을 만들 때는 상세 데이터까지 활용할 수 있어요.
피치덱은 감정과 메시지 중심으로 구성합니다.
스토리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발표자가 어떤 순서로 어떤 표정으로 말할지까지 고려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인베스터덱은 지표 중심으로 만들되, 각 숫자마다 근거와 가정을 명시해야 해요.
“우리가 추정한 수치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정확한 수치입니다”라고 허세 부리는 것보다 훨씬 신뢰를 줍니다.
제출 타이밍이 승부를 가른다
이 두 자료의 제출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피치덱은 당연히 데모데이에 쓰이고, 인베스터덱은 그 직후에 바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작년에 만난 한 핀테크 창업자는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데모데이 당일 오후에 관심 표현한 VC들에게 인베스터덱을 일괄 발송했어요. 다음 날 오전에 벌써 미팅 요청이 들어왔죠.”
반대로 준비가 안 된 팀들은 “자료 정리해서 나중에 보내드릴게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VC는 “실행력이 부족한 팀”이라고 판단해버려요.
결국 스토리와 숫자, 둘 다 있어야 투자다
피치덱과 인베스터덱은 서로 다른 무기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해 갑니다.
투자유치라는 최종 목표 말이죠.

피치덱은 문을 열어주고, 인베스터덱은 계약까지 이끌어줍니다.
둘 중 하나만 잘 만들어도 어느 정도 반응은 얻을 수 있지만, 실제 투자까지 이어지려면 두 가지가 모두 준비되어야 해요.
많은 창업자들이 “디자인만 예쁘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IR자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획과 스토리 전략입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논리를 펼칠 것인가, 어떤 데이터로 어떤 확신을 줄 것인가가 투자 성공의 핵심이거든요.
스타트업IR은 결국 설득의 과정입니다.
감정으로 관심을 끌고, 논리로 확신을 주는 것. 그 두 단계에 맞는 무기를 각각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창업자의 전략입니다.
데모데이를 앞두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두 번째 덱을 준비하세요.
발표가 성공적일수록, 그 다음 질문은 더 빨리 올 테니까요.